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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영국맛 경마 피규어 이야기

 

옛날 옛날 19세기말 영국에 윌리엄 브리튼이라는 사람이 살았어요.

 

시계공이었던 양반이 일 때려치우고 장난감 공장을 세운건 다름아닌 독일놈들 돈 버는게 꼬와서였어요.

 

 

독일놈들이 만든 주조식 주석합금 피규어가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거든요.

속이 꽉 찬 금속제다보니 존나 무겁고,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대체가 불가능했어요.

 

 

여기서 브리튼은 납을 주형틀에 붓고 식기전에 빙빙 돌리면서 안쪽의 납이 밖으로 틀 밖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방식을 생각해냈어요.

이렇게 만들면 겉모양은 독일제랑 똑같지만 속이 텅 빈 피규어를 만들 수 있었죠.

당연히 독일제보다 훨씬 가벼워서 갖고놀기 쉽고, 결정적으로 재료비가 줄면서 단가를 획기적으로 낮출수 있었어요.

 

그렇게 1893년 윌리엄 브리튼이 자기 이름을 따서 세운 W Britain은 순식간에 장난감 병정 시장을 석권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장난감 병정 팔아먹던 W Britain은 슬슬 사업분야를 확장해보기로 했어요.

사람들이 병정놀이만 하고 놀 리는 없으니까 슬슬 다른 먹거리도 필요했거든요.

갖고 있는 기술력으로 이제는 군바리말고 민간인을 찍어내서 팔고 싶어했어요.

 

 

 

여우 사냥 시리즈(짤은 복각판)

 

 

축구 피규어 시리즈라던가 크리켓 피규어 시리즈

(윗짤은 지금 보면 뭔가 싶을 퀄리티지만 아스날 애들이래요)

 

 

이렇게 야금야금 시리즈를 늘려가던 브리튼이 경마에 눈을 돌린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어요.

장난감 병정 만들던 시절부터 사람이랑 말은 질리도록 찍어냈다보니 딱히 만드는게 어려울 것도 없었거든요.

다만 세일즈 포인트는 유명한 '명마'가 아니라 유명한 '마주' 쪽이었어요.

그도 그럴게 실제 말을 그대로 모사하는건 채색에서 여러모로 골치가 아픈 문제예요.

 

 

아무리 유명한 말이라도 이런거 따라 그리라고 하면 채색하는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킬테니까요.

 

 

 

하지만 마주에 집중한다면 이런 도안만 제대로 따라 그리면 되는 문제예요. 훨씬 낫죠.

그렇게 말 디자인은 단순화하고 마주 쪽에 포커스를 두고 낸 브리튼의 피규어 시리즈가 바로

Racing Colours of Famous Owners(유명한 마주들의 승부복) 시리즈예요.

 

이 시리즈의 초판은 1925년 당시 영국 경마판을 지배하던 오너브리더(생산과 소유를 동시에 하는 목장주 겸 마주) 여섯이었어요.

 

H.M. THE KING 국왕 폐하(조지 5세)

 

 

Lord Astor 애스터 경 (제 2대 애스터 자작 월도프 애스터)

 

 

Lord Derby 더비 경 (제17대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탠리)

 

 

 

등 총 여섯개가 들어간 세트가 이 시리즈의 초판 (No.237)이에요.

그 후 다른 마주 여섯을 모아 만든 후속작으로 No.1463이 나오는데

 

H. H. Aga Khan 아가 칸 전하 (아가 칸 3세)

윗짤 컬러는 아가 칸 3세 사후 아들 알리 칸으로, 알리 칸이 죽은 뒤에는 아가 칸 4세가 자기 말이 두마리 이상 나오는 경주에서 세컨드 컬러로 썼어요.

 

 

당시 제품의 카탈로그 넘버. 1480에서 시작하는 모델별 고유 넘버는 1951년에 RC(Racing Colours를 의미)로 시작하는 넘버링으로 개편돼요.

RC1이 H.M. The King, RC2가 Lord Astor, RC3가 Lord Derby...일케요.

 

위에서 언급된 초기 버전 시리즈는 1941년에 생산이 중단돼요. 이유는 간단했죠.

 

이 새끼 때문이었어요.

전쟁통에 귀한 납과 주석을 고작 장난감 만드는데 쓸 정신 같은건 없었기 때문이죠.

전쟁이 끝나고서도 한동안 배급제가 지속될정도로 곱창난 경제사정 덕에

브리튼은 1951년이 되어서야 해당 시리즈의 생산을 재개할 수 있었어요.

 

 

전쟁후 리이슈한 패키지의 모습이에요.

파란색 or 검정색 글씨 에 흰색 박스였던 전쟁전 모델과는 달리 빨간색 글씨에 크림색 박스로 바뀌었고,

1958년부터 생산한 패키지의 속지에는 경마장 그림을 그려넣어 박스째로 디스플레이가 가능하게 하는 서비스가 들어갔죠.

 

피규어의 디테일에서도 미묘하지만 확실한 차이가 하나 있는데,

 

 

붓도색으론 미스내기 쉬워서 생략됐던 코굴레가

 

 

에어브러시 기술의 힘을 입어 깔끔하게 칠해지게 되었어요.

 

 

 

 

RC83 윈스턴 처칠

예전에 비하면 일반인 수요에 맞춰서 유명 인사들의 버전들이 많이 나왔어요.

 

 

미국 마주 버전도 나왔고,

캐나다 버전도 소수지만 나왔다고 하네요.

1960년에 단종될때까지 추정 250종 이상의 모델이 나왔어요.

 

 

이 시리즈는 데이터를 정리하려는 수집가들의 머리통을 골아프게 했어요

1925년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줄잡아 250종류 이상 제조되었지만

브리튼의 판매 카탈로그에 제대로 등재된건 딱 63종뿐이거든요.

시대가 지나면서 새로 등장하는 '성공적인 마주'들이라던가

인디오더로 수백개, 한다스, 심하게는 한두개만 주문받아서 출고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올 화이트로 출고하곤 '니가 알아서 칠하쇼' 식으로 던져주는 도색 커스텀 전용 모델도 있었어요.

 

이렇게 수많은 카탈로그에 없는(uncatalogued) 모델들의 정보가 정리된 건 피터 커크라는 영국 수집가 덕이었어요.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샘플 카드들을 경매장에서 모으고 오류를 수정한 끝에 이런 가이드북까지 냈다고 하네요. 역시 씹덕이 작정하면 무서워요.

 

채색된 말의 컬러는 검정색, 갈색, 회색의 3종류였고, 갈색의 갈기와 꼬리는 항상 검은색이었어요.

실제 회색말의 비율은 3% 정도지만 구매자의 선호도는 훨씬 높았기 때문에

실제로 출고된 색상의 비율은 갈색 75 : 회색 20 : 검정 5 정도였다고 해요.

 

RC141 엘리자베스 왕대비

검정색 중에서도 얼굴에 흰 유성이 있고 발굽이 회색인 물건이 수집가 입장에선 가장 희귀한 컬러였다고 해요.

 

 

현재 이 시리즈는 옥션 시장에서는 상태 좋고 희소성 있는 물건은 700~1000달러를 훌쩍 넘기곤 해요.

단, 살 마음이 있다고 쳐도 매물 상태는 꼭 확인해야 해요.

이베이만 봐도 패키지 박스에 있는 이름과 구성품의 레이싱 컬러가 따로 노는 함정카드가 즐비하니까요...

(아가 칸을 윈스턴 처칠이라고 팔아먹는다던가)

 

 

 

 

참고로 브리튼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장난감 장사를 잘 하고 있어요. 여기저기 팔려다녔다가 지금은 타카라토미 산하에서 다이캐스팅 미니어처를 팔고 있어요.

 

 

W. Britain 브랜드는 미국의 퍼스트 기어에 분할 매각돼서 여전히 다양한 군인 피규어들을 뽑아내고 있어요.

3번짤의 디테일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네요.